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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향을 찾아서 [문화일보 2006-02-25 ]

2006.07.13 13:01

권현주 조회 수:2305 추천:157

<살며생각하며>


몇년 전 혼자서 베를린에서 오스트리아로 가는 길에 영국 노인과 만나 서너 시간 한담을 하며 기차여행

을 한 적이 있다. 그 노인 은 이미 팔순을 넘긴 나이였는데, 평생을 직업군인으로 떠돌았다 고 한다. 지브

롤터에서 분쟁이 일어났을 적 이야기를 할 때는 열혈청년 못지않게 자신의 무용담을 펼쳐 놓기도 했었다. 물론 한국도 서너 차례 다녀가서 남대문시장까지 알고 있었다. 그 노인 은 내가 잠들려 하자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는 말을 건넸다. “여보게, 지구는 생각보다 작고, 인생은 생각보다 길다네.” 다들 인생이

짧다고들 투덜대는데, 왜 그 노인은 인생이 생각보 다 길다는 생각을 했을까.



며칠 전, 서울연극학교 시절 극작을 가르쳐 주셨던 은사께서 밀양연극촌을 방문하셨다. 내년 은퇴 후

노부부가 살집을 찾아다니시다가 우연히 밀양연극촌에 들르신 것이다. 은사께서는 밀양연극촌에서도

예닐곱 가족이 자식을 키우면서 가정생활을 유지하고 있는 모습을 확인하신 순간 ‘여기다!’고 마음의 결

정을 내리신 모양이다. “나 여기서 살 거야. 여기서는 내가 해야 할 일이 있을 것 같애 .” 그러시고 서울

가셨는데, 사흘이 멀다 하고 전화를 계속 주신다. 집은 어떻게 짓고 싶고 언제 입주할 수 있느냐는 등 구

체적인 계획을 진행시키고 계시는 모양이다. 은사께서 처음 밀양 오셔서 하신 말씀이 언뜻 내가 만난 적

있는 영국 노인을 연상케 했다. “살아 있는 시간이 너무 길어….” 근래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슬로건이

상당한 설득력을 얻으면서 시골 한적한 곳으로 이주하는 가구 수가 늘어나고 있다. 그러면서 시골에서

의 삶이 얼마나 인간적이고 자연의 순리에 따르는 삶 이냐고 역설한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시골이나 산 속에 위치한 낙향 가족들이 진정 그렇게 편안하고 바람직한 인생을 살고 있는가? 내 주위를 돌아보면 결코 사정이 그렇지 않다. 상당수 집이 지역 주민들로부터 고립된 삶을 유지하고 있거나 아예 썰렁하게 비워져 있다. 이런 식의 낙향은 스스로를 사회로부터 격리시키는 패배주의적 사고이며 일종의 현대판 유배생활일 수밖에 없다. 오늘의 한국 사회가 젊은 대중주의의 기세로 각계각층의 중견 원로들을 밀어낼 때, 이런 각박한 세상과 타협하거나 굴복하기 싫어서 도시를 떠나는 어른들. 그들이 세우는 시골이나 산 속의 집 이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섬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한국 사회는 구조적으로  나이든 어른들이 살기에 만만찮은 분위기를 연출한다.



21세기를 특징짓는 두 가지 슬로건을 들라면  ‘대중’과 ‘젊음’이다. 젊고 대중적이지 않은 모든 것은 밀려난다. 한국영화계에서 감독은 40대만 넘어도 환갑이다. 그래서 박광수 감독같은 명장이 영화를 찍을 수 없고, 70년대의 흥행감독 배창호가 21세기에 는 저예산 독립영화를 찍고 있다. 세계적 거장의 반열에 오른 임권택 감독의 100번째 영화가 투자 가 이뤄지지 않아 브레이크 걸릴 정도이고, 방송계에서는 선·후배의 서열도 사라져서 젊은 주연 연기자의 스케줄에 맞춰 촬영이 진행된다. 이런 젊은 대중주의의 기세 앞에 지금까지 한국 사회를 책임져 왔던 중견 원로들은 상당히 난처한 모습들로 엉거주춤 서 있다. 물론 이런 사회 현상에 대한 처방책이 나름대로  마련되고 적극 권장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전직 장군이 아파트 경비원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는  사실이 사회적 미담으로 TV 화면을 채우 고, 전직 교장 선생님이 구두 수선공을 한다고 신문에 사진까지 실려서 대서특필된다. 우리 사회가 그만큼 탈 권위적이고 자유로운 개인의 삶이 존중되는 세상으로 성숙되고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런 미담은 자신의 권위를 벗어던진 자유인의 신문 가십거리 에피소드일뿐 우리 사회의 바람직한 현상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자신이 따랐던 장군이 아파트 경비원이 되어 있고, 교장 선생님 찾아뵈러 갔더니 구두 수선 가게를 차리고 계시더라는 것이 반드시 미담일 수는 없는 법이다.



이런 식의 사회적 분위기는 평생 한 직업에 종사해 왔던 어른들의 권위와 전문성이 무 시되는 것이며, 그들의 존재를 하향 조정시키는 재활용 대책에 다름 아닌 것이다. 하지만 어쩌랴. 이런 식의 낙향은 앞으로 계속될 것 같고, 나 또 한 일찌감치 인구 10만 남짓한 밀양에 터를 잡고 살고 있어서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가 않는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낙향자를 위한 조언을 ‘살며 생각하며’ 지면을 빌려 해볼까 한다.



역대 낙향자 중에서 가장 성공한 사람을 들라면, 단연 다산(茶山 ) 정약용(丁若鏞)일 것이다. 정약용이 관직에 있으면서 세운 가장 큰 업적은 정조를 도와 수원 화성행궁을 건설한 일이다. 그러나 일반인들은 정약용이 화성행궁을 건설한 책임자라는 사실을 거의 모르고 있을 뿐더러 그 업적을 안다고 하더라도 별스러운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우리가 정약용을 기억하는 것은 그가 지은  실학서들이고, 그 책들은 정조 사후 벼슬을 떠나 낙향생활 중에 저술한 것들이다. 예를 들어, 지방 행정관들을 위한 교과서격인 ‘목민심서’는 자신이 경기도 암행어사 재임시 목격했던 목민관들의 실상과 한직으로 밀려나 지방 관리로 재직했던 경험이 토대가 되어 기술된 것이다. 결국 세상 한가운데서 잘 나가던 시절의 업적은 기억되지 않고, 낙향지에서 일했던 저술작업이 빛나는 삶의 기록으로 남은 것이다.



다산 정약용의 사례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낙향 가이드는 첫째, ‘낙향하더라도 자신의 전문성을 절대

포기하지 말라’는 것이다. 다산은 겨우 목숨을 부지한 채 유배지로, 낙향지로 떠돌면서도 결코 관리로

서의 자기 존재를 포기하지 않았다. 전직 관리로서 낙향지에서 할 일이 무엇이었는가. 결국 어떻게 하

면 좀 더 백성을 잘 다스릴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세상 경영자로서의 생각을 포기하지 않았던 것이다.



중견 원로들이 낙향지에서 저 혼 자 옛 추억에나 잠기고 세상과 담을 쌓고 지낸다면 그런 낙향은 결국

유배생활인 것이다. 오히려 지금까지 일해 오면서 자신의 뜻대로 해 보지 못한 꿈을 낙향지에서 시도해

본다는 적극적이고 독창적인 사고를 지니는게 중요할 것이다. 낙향자를 위한 두번째 가이드는 ‘지역 주

민들의 삶 속으로 스며 들어가라’이다. 낙향자들이 도시에서 온 이방인 신세로 존재 한다면, 그런 낙향

이 곧 유배생활이다. 생활의 불편은 말할 것도 없고 급기야 자신이 도시에서 뿐만 아니라 낙향지에서조

차 고립 되면서 이 세상의 미아가 돼 버렸다는 것을 실감하게 될 것이다.



지금의 한국 사회는 지나친 도시 집중으로 공동화돼 버린 지역이 도처에 산재해 있다. 그러나 아무리 한적한 벽촌이라 하더라도 사람이 살고 있으며 그들 나름의 세상에 대한 정보와 식견을 갖추고 있다. 그들 스스로 사람을 알아보는 눈이 있다는 것이다. 세상에 대한 의욕과 관심이 있어도 일할 인재가 없고 기회가 없어서 공동화돼 버린 지역사회. 이 빈 공간에 우리 사회의 중견 원로들이 스며들어가서 스스로 이웃이 된다면 아연 활기를 띠게 될 것이다. 이런 식의 활기는 오히려 대도시에서 일할 때 보다 훨씬 파급효과가 크고 분명하게 드러날 수 있다. 한적하게 비어 있는 만큼 그만큼 치열하게 채우고 싶은 의욕이 반작용으로 잠재해 있기 때문이다. 서울에서도 연극 관객이 없는데 밀양에서 누가 연극을 보러 오겠는가 스스로 반문한 적이 있다.



그러나 서울대학로에 세운 극장은 항상 관객 가뭄에 허덕이는데, 밀양연극촌 주말극장 관객은 별스러

운 홍보 없이도 극장 객석이 거의 메워진다. 21세기가 젊음의 세기이고 대중주의의 바람을 일으킨다면,

그건 지금 이곳 우리의 삶이 여전히 전시대적 서울 중심주의적 사고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는 것을 입

증하는 것이다. 서울 중심주의적 사고가 21세기에 들어 젊은 대중주의에 점령되고 있다면, 이제 우리

사회의 중견 원로계층은 서울을 떠날 준비를 하는 것도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차라리 한국 사회의 중

심이라고 하는 서울을 젊은 그들에게 기회의 땅으로 내어주는 것이다. 대신 우리 는 새로운 약속의 땅

을 찾아 나서는 것이다. 우리에게 어느 정도의 경제력이 있고 전문성이 있고 삶의 경험이 있는데 무엇

이 두려우랴.



그러나 결코 우리는 놀러가거나 쉬러 가거나 은둔하기 위해 낙향 하는 것은 아니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하고 싶은 꿈과 의욕을 가지고 같이 일하면서 살아갈 이웃을 찾아 나선다면 낙향지는 그대로 미지의 땅이며 꿈의 공간일 수 있다. 그 곳에서는 세상 눈치볼 것도 없고 타협할 필요도 없는 나만의 독창적 세계이며 이상향일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어쩌면 그런 이상향을 찾아 낙향의 뜻을 세우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윤택/극작가, 연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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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전문성을 절대 포기하지마라"

"지역주민의 삶 속으로 스며 들어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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